책: 핑거포스트, 1663 - 네 개의 우상

Posted by 내일인화

2012. 6. 16. 14:09


<사진출처: http://oxfordworldbookcapital.wordpress.com/2012/05/18/oxford-fiction-a-round-up/an-instance-of-the-fingerpost/>



저자가 이언 피어스다. 눈에 익은 이름이라 한참동안 생각했는데 책 읽다가 문득 떠올랐다. 이언 피어스는 <초상화 살인>의 저자이다! 이번 책 역시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지만 다행스럽게도 책 전체가 독백은 아닌 비교적 '평범한' 일인칭 시점이다. 아니 뭐 그렇다고 내가 <초상화 살인>식의 전개가 지겨웠단 건 아니다. 


불행히도 두 권으로 나눠져있어서 나는 1권을 다 읽고 도서관에 찾아가서 반납하고 다시 2권을 빌려서 돌아와야 했다. 처음부터 두 권 다 빌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2권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을 때 마침 시험기간도 거의 끝났기 때문에 도서관에는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닌 진짜 책을 읽기 위해 온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날씨는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고 먹구름 때문에 어둑어둑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도서관의 모습에 좀더 가까웠다. 내가 이런 우울한 날씨를 좋아한다고 해서 내 성격까지 우울한 건 아니지만, 뭐 여튼 폭풍우 쏟아지는 밤이 'cuddle weather'인 건 부정할 수 없다. 


첫번쨰 파트에서 베네치아 사람인 콜라의 증언을 읽는 내내 이 사람이 어떤지 대충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것도 신사로서 하기 부끄럽고 저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아서 싫다. 우스꽝스럽지만 나 역시 어느정도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지극히 상식적인 일도 어떤 관점에 따라서는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자기 칭찬하길 좋아하고 사람들과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를 갖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런 콜라가 들려주는 증언은 두번째 파트에서 완연히 뒤집힌다. 두번째 파트를 서술하는 잭 프레스콧은 (콜라가 객관적일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있던 나의 순진함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도입부에서부터 


"...(자기한테 유리한 것만 기억하는 게 흠이긴 하지만)" 


이라고 말함으로서 콜라의 증언의 신빙성을 제거해버린다. 그리고 책장을 넘길수록 심해지는 자칭 '신사들' 특유의 거만함과 오만함. ㅡㅡ 2부를 읽기 시작했을 때 잭 프레스콧은 아직 어리고 미숙하긴 하지만 정의롭고 열혈적인 바른 사나이인 줄 알았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 수록 이마는 점점 찌푸려졌고 (<초상화 살인>에서도 그랬지만 이안 피어스는 등장인물을 은근히 재수없게 만들어버리는 데 일가견이 있다.) 책을 덮을 때는 잭 프레스콧이 비열하고 허접한 우월감에 휩싸여있으며 자기합리적인 행동에 도취해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잭 프레스콧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기 때문. 누구라도 아버지가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확신하게 된다면 정의롭게 굴기보다는 신속하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편파적으로 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는 문제이고. 하지만 사라 블런디에게 한 짓이 정당화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프레스콧은 정말 쓰레기 같았다. 어쨌거나 2부의 증언은 1부의 증언을 보충해줄지언정 믿을만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제 2권을 빌려서 3부 4부를 읽으면 2부가 얼마나 한쪽으로 치우친 자기 변명인지를 알게 되겠지. 


내가 좋아하는 인물은 키티이다. 여자와 아이를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기며 아예 카테고리를 다르게 구분해버리는 세상에서, 키티는 비록 창녀이지만 자유분방한 사상과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잭 프레스콧이 더 개새끼같이 느껴졌을지도 모르지. 




수치심이야말로 인간이 경험하는 감정 가운데 가장 강력한 감정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지리상의 대발견은 대부분 그 시도를 포기했을 때 겪어야하는 

비웃음과 수치심을 염두에 두면서 자신을 채찍질한 결과로 이루어졌다. 




존 매스턴은 이제 죽은지 오래다. 나는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가 지옥불 속에서 오래 고통을 당할 수록 

그에게는 더욱 합당한 벌이 된다는 점을 헤아리시고, 

그를 어서 빨리 지옥불 속에서 꺼내달라는 내 기도를 무시해주었으면 싶다.




"당신네 가톨릭은 지옥에서 떨어질 대죄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데,

그건 정말이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교리요."




나는 옥스퍼드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곳 분위기에 완전히 젖어들어

그곳의 대다수 주민들처럼 우울증에 걸려버린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됩니까? 무례한 놈이 되지 않으려고 교수대에서 죽어야 합니까?

나는 탈옥해야 헀고, 그것이 유일한 기회였습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젊은이는 생각이 단순해서, 만사가 잘될 거라고 믿는다.

신의 섭리는 그리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는 것도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의 일부이다.




'우리'라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토머스 켄의 성직자다운 겉모습 속에는 

빵 한 조각과 포도주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흥분을 갈망하는 인간이 숨어있었다. 




"너는 지금 땡전 한 푼 없는 배신자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면서도,

돈 많은 겁쟁이의 친절에 기대서 살고 있어."




"대부분의 여자한테는 결혼이 꿈이야."

"힘들게 번 재산을 남편에게 넘겨주는 게 말인가요? 남편의 허락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게 말인가요?

그거 참 멋진 꿈이군요."

(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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