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초상화 살인

Posted by 내일인화

2012. 5. 19. 01:09


<사진 출처: http://www.antique-fine-art.com/>


독백위주의 흥미로운 전개방식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다. 

대화는 거의 없고 화가가 친구이자 저명한 비평가인 모델에게 일방적으로 뱉아내는 말으로 장이 넘어가지만 의외로 지겹지는 않다. 

단, 전반적으로 지겹지는 않다는 말이지, 후반부에 들어설때 쯤에는 현재진행형인 사건이 생기지 않고, 딱히 이렇다할 갈등도 없으므로 조금 지루해진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기기는 하는 건가 싶어서 책 제일 뒷장을 슬쩍 훔쳐보고 싶은 충동도 종종 들었다. (하지만 그것만큼 독서 전체를 망치는 일도 없기에.) -뭐 어쨌거나 무슨 일이 있기는 하더라. 


화가가 젊은 시절, 깊이 존경하던 친구를 조롱하고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과정에서 예전에 있었던 사건들이 드러난다. 친구의 권력에 대해 농담조로 비난을 던지고, 친구의 보호막 아래에 있던 나약한 자아를 깨버렸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덤덤하게 팩트를 나열하지만 사실은 화자는 친구의 죄악과 그로인한 성공을 참을 수 없어한다. 


마지막 장에서 화자와 친구가 함께 바다를 보러나가며 화자가 폭풍우 치는 날의 바다가 얼마나 위험한지 설명하는 장면에서는 결국 화자가 친구를 바다고 밀어버릴 것이라는 (혹은 적어도 그러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비평가이자 화가 사이의 미묘한 갈등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또한 바다에 대한 묘사 역시 인상적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제목이다. 영어 제목은 <The Portrait> 인데 <초상화'살인'> 보다는 차라리 그냥 <초상화>가 나았을 것 같다. 나는 또 무슨 추리소설인 줄 알고 책을 집은거란 말이야. 


화자가 스코틀랜드 출신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좋은 기억밖에 없으니까.

자부심 돋는 잉글랜드나, 마냥 따땃한 동화 속 웨일즈보다는 스코틀랜드가 더 좋았다.





이 그림은 '헨리 모리스 맥알파인이 그린 어느 신사의 초상'이 될까?

 아니면 '이름 없는 화가가 그린 윌리엄 나스미스의 초상'이 될까?




어쨋거나 난 명성이 반드시 사라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가만히 앉아서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진 않았어. ...다른 사람들이 내 명성을 깨뜨리는 게 싫었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때려눕히기 전에 내가 나 자신을 넘어뜨린거야.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가 아침을 먹으면 이미 영혼을 잃어버리는 셈이지. 

그러니 아예 살인도 해버리면 어떨까?




하나님을 닮았다는 인간의 위엄있는 모습을 바다가 그렇게 쉽게 끔찍하고 괴기스러운 꼬락서니로 만들다니.




미켈란젤로에게 율리우스 교황이 없고, 터너에게 러스킨이 없고, 마네에게 보들레르가 없었어도 

그 사람들이 그렇게 유명해질 수 있었을까?




자넨 스코틀랜드에 가 본 적도 없지? 협곡을 면해 있는 벼랑의 꼭대기.

사람을 쓰러뜨릴 듯 윙윙대는 바랍 속에 서서 한때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이야.




우리에겐 쉰아홉가지의 회색이 있지. 말하자면 스코틀랜드는 회색의 나라야.

음울한 새벽과 위협적인 광풍이 몰아치는 아침, 그 둘의 차이 속에서 우린 하느님이 창조한 것을 모두 볼 수 있다네.




제리코가 그린 <메두사의 뗏목> 생각나? ...처절하고 영웅적인 사람들이 캔버스를 지배하지, 

그들이 핵심인 것 처럼 말이야. 

그렇지만 사람을 바다에 갖다 놓아봐. 무의미하고 우스꽝스러울 뿐 전혀 영웅적이지 않아.

바다는 그들을 한입에 집어삼키고는 그랬다는 사실조차 모를거야.

...딱한 일이지. 인간을 영웅으로 만들어주려고 바다가 있는 게 아니니까.




그녀는 죽고 싶었기 때문에 죽은거야.

그녀는 하려고만 하면 무엇이든 잘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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